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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차세대 자동차 전쟁에 낀 한국

인산철뱅크 2010. 8. 18. 12:28

미국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의 GM 공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세계 자동차산업사(史)가 '미래형 자동차 주도'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신호탄이었다. 이로써 벌어질 자동차 전쟁의 배후는 미국 오바마 행정부다. 아예 새로운 판을 짜는 방법으로 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도전자들을 퇴치하고 자동차 산업 헤게모니를 탈환하겠다는 속셈이다.

지난 7월27일, 미국의 대표적 자동차 메이커인 GM은 오는 10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출시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36쪽 상자 기사 참조) 시보레 볼트(Chevrolet Volt)의 가격을 4만1000달러로 고시했다. 12월부터 일본 닛산의 '순수 전기자동차' 리프(Leaf)가 미국 시장에 나온다는 것을 감안하면, 차세대 자동차 시장을 둘러싼 '미·일 전쟁'이 임박했다. 이 전쟁의 대립 구도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볼트) 대 순수 전기차(리프)'인 동시에 '시장 선도자(일본) 대 추격자(미국)'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현대·기아, 도요타, 혼다, 포드, 메르세데스 벤츠, BMW 등 세계적 메이커 역시 올해와 내년 사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와 순수 전기차를 속속 내놓을 예정으로 21세기 자동차 시장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뜨거운 혼전이 예상된다.





ⓒAP Photo 오바마 미국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이 올가을 출시되는 GM의 전기차 시보레 볼트의 조립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플러그인 vs 순수 전기차

전초전이 시작된 것은 1990년이다. 당시 독일 자동차 메이커인 포르쉐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출시했으나 판매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포르쉐 이후 도요타·혼다·GM·포드 등이 앞 다퉈 하이브리드 차를 쏟아냈다. 그러나 이 시장은 2009년까지 '도요타 독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도요타는 절대 강자였다. '마일드 하이브리드' 차종으로 1997년 일본에서 태어난 도요타 프리우스(Prius)는 2003년 미국 시장을 거쳐 지난해 하반기에는 전 세계 누적 판매량 200만 대를 기록했다. 2010년 초 현재 미국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160만 대 중 절반이 프리우스일 정도다.

다른 갈래로는 미국의 전기자동차 전문업체인 테슬라(Tesla)가 있다. 테슬라의 로드스터(Roadster)는 '순수 전기차'로는 드물게 고속도로 주행이 가능한 차다. 그러나 로드스터는 아주 특수한 자동차다. 일반 시장을 겨냥해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상품이 아니라 부유층의 주문에 따라 '맞춤 생산'하는 일종의 사치품인 것이다. 가격도 10만 달러가 넘는다.

이처럼 기존 '대안 자동차'들은 '마일드 혹은 풀 하이브리드'로 자동차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신상품이 아니거나, 특수한 시장(부유층)을 겨냥한 것이었다. 볼트와 리프의 출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상품이 '대중 시장'에서 맞붙는 단계가 드디어 만개했다는 의미다. 여기서의 승자가 21세기 세계 자동차 시장의 향방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조건은 어떤가. 우선 GM 볼트의 가격은 4만1000달러로 동급 휘발유 자동차 가격의 두 배에 가깝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가 친환경 차량에 적용하는 세제 혜택(Tax Credit)이 7500달러에 이를 것을 감안하면 소비자가 실제 지불하는 금액은 3만3500달러 정도다. 닛산 리프는 3만2780달러로 책정되어 있는데 이 역시 세제 혜택을 받아 실제 가격은 2만5280달러 정도일 것이다. 볼트가 8000달러 정도 더 비싸다.





ⓒ현대차제공 현대차가 최근 출시한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 2011년형.

GM은 볼트가 리프보다 비싼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주행거리가 훨씬 길기 때문이다. 볼트는 배터리를 충전하면 40마일을 주행할 수 있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내연엔진이 발전기 구실을 하면서 300~400마일을 더 달릴 수 있다고 한다. 합치면 340~440마일이다. 이에 비해 리프에는 내연엔진이 없다. 그러나 한 번 충전하면 100마일을 재충전 없이 주행할 수 있다. 결과만 따지면 충전 없이 주행할 수 있는 거리에서 볼트가 훨씬 우월하다. 그래서 GM 측에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전기차가 아니라 자동차다운 자동차'이며 그것이 닛산에 대한 볼트의 우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닛산·BMW·테슬라 등 '순수 전기차'를 내놓았거나 앞으로 출시할 자동차 메이커들은 GM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 타임 > 보도에 따르면 이 메이커들은 미국인의 76%가 하루에 40마일 이하를 운행한다고 주장한다. 리프 등의 순수 전기차야말로 미국인들의 라이프사이클에 적절한 상품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이 같은 볼트 대 리프의 대결 배후에는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있다. '총성'의 진정한 진원지는 디트로이트가 아니라 워싱턴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트의 제조업체가 GM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2008년 가을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파산한 GM에 막대한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국유화했다. 2010년 8월 현재 미국 정부는 GM의 지분 중 61%를 소유한 사실상의 오너다. 오바마 대통령은 후보 시절 "2015년까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100만 대를 거리에서 볼 수 있게 하겠다"라고 다짐한 바 있다. 오바마는 국유기업인 GM을 지렛대로 자신의 공약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AP Photo GM에 맞서는 닛산의 '순수 전기차' 리프. 충전하면 전력만으로 100마일을 달린다.

오바마의 자동차 산업 전략

오바마 행정부의 두뇌집단인 미국진보센터(CAP)에 따르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 이른바 클린 자동차 산업은 '기후변화 방지'라는 진보적 환경주의의 의제인 동시에 미국 경제를 부활시킬 수 있는 결정적 변수이다. 미국 자동차 업계에 혁신을 강제함으로써 △신기술과 새로운 산업 △새로운 투자 △재교육을 통한 노동자 숙련도 향상 따위 과제를 동시에 성취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진보센터는 클린 자동차 전략으로 2020년까지 자동차 부문에서 19만 개 일자리와 여기서 파생되는 15만 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를 통해 한때 지구를 제패했던 '자동차 왕국'의 지위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타당성 있는 전략이다. 자동차 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전후방 효과와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 더욱이 2010년 현재 미국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약 2억5000만 대에 달한다. 이후 20~30년 동안 이 차량들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나 순수 전기차로 바뀌어 나간다면 그 효과는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미국 경제의 구조를 바꿀 정도로 클 수밖에 없다.

업계와 소비자를 동시 지원

이런 전환에서 볼트는 마중물(펌프질할 때 붓는 물)이 될 수 있다. 볼트를 통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순수 전기차 등 '대안 자동차'에 대한 강력한 수요를 만들어내고 이를 흡수할 생산업체로 GM 등 미국 메이커를 키우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은 제조업 공동화와 사상 유례없는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대안 자동차' 산업을 계기로 미국 제조업과 수출을 부흥시키는 것도 '오바마 경제전략'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전략을 위해 오바마 행정부는 공급과 소비에 걸친 전방위 전략을 구사해왔다. 공급 면에서는 우선 미국 시장의 자동차 업체들이 연료 효율성을 향상시키도록 유인하는 제도인 평균연비 기준을 상향 조정하고 있다. 현재 27mpg(mile per gallon:갤런당 마일)인 평균연비 기준을 2016년까지 35mpg로 올리도록 '권장'하고 있다. 배기가스도 2009년 현재의 3분의 1로 줄이도록 규정했다. 이는 해외 자동차 회사에도 적용된다. 규제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조처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3월, 전기차 개발에 24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자동차 공급업체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다. 이 중 15억 달러는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 기술에 투자된다. 특히 '세계 배터리 산업의 수도'를 자임하는 미시간 주에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 미시간 주의 배터리 산업에는 지난 2년 동안 모두 60억 달러 규모의 정부지원 및 민간투자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볼트의 배터리를 독점 공급하는 LG화학 공장도 미시간 주에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제조기술의 발전으로 배터리 값이 몇 년 사이 70% 가까이 인하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로 인해 더 많은 미국인이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전기차를 더 싼 값에 구입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뉴시스 도요타 프리우스(위)는 2000년대 들어 세계 하이브리드 자동차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해왔다.

한편 전기차의 소비를 활성화하기 위한 파격적인 정책도 병행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2008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연비 낮은 자동차를 신차로 바꾸는 소비자에게 4500달러씩 지원했다. 또한 미국 하원은 2008년 말 전기차 구입자에게 2500~7500달러의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해당 차량의 배터리 성능이 좋을수록 많은 세제 혜택이 적용된다. 그러나 자동차 메이커별로 25만 대까지만 가능하다. 초기 시장에 불을 붙이는 전략으로 내년쯤에는 판매량이 늘면서 소진될 전망이다.

그런데 벌써 이 조처를 연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지난 7월 말 열린 에너지 정책 관련 콘퍼런스에서 미시간 주지사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생산비용이 인하되어 휘발유 차의 내연엔진 생산비용과 비슷해질 때까지 세제 혜택을 계속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 에너지부는 현재 전국에 1000여 개에 불과한 전기차 충전소를 내년 말까지 1만여 개로 늘리기로 하고 이에 대한 자금지원에 들어간다. 지구적 차원에서 신산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이런 활력이야말로 미국 자본주의의 힘일 것이다.

한국, 잠재력 있으나 시장 진출 늦어

그렇다면 국내 업체들은 이 새로운 국면에 어떻게 대처할까. 차세대 배터리 부문에서는 LG화학과 삼성SDI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LG화학은 미국 미시간 주의 현지 공장에서 GM 볼트의 배터리를 독점 공급할 전망이다.

현대·기아차는 '대안 자동차' 부문에서 만만치 않은 잠재력을 보여왔다. 이 회사는 지난해 7월 '마일드' 혹은 '풀' 하이브리드로 분류될 수 있는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에 이어 올해 10월에는 미국 시장에 쏘나타 가솔린 하이브리드를 출시할 예정이다. 또한 지난 1월에는 시카고에서 열린 오토쇼에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콘셉트 카인 블루윌(Blue-will)과 레이(Ray)를 출품했다. 특히 블루윌은 한 번 충전하면 GM 볼트와 비슷한 최대 64km(약 40마일)까지 주행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양산은 2012년이나 되어야 이루어질 전망이다. 순수 전기자동차인 'i10 EV'도 올해 시험용 생산을 거쳐 내년에 시범운행에 들어간다. 'i10 EV'도 한 번 충전하면 최대 160km(100마일) 주행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닛산 리프의 성능에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능력을 가졌다'는 것과 '시장에 뛰어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또한 전기차 시장이 올가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차는 이미 늦었다. 볼트, 리프 등 신제품의 성과를 지켜본 다음 본격적인 시장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신중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은 현대·기아차의 전략이 '볼트-리프 격돌' 이후 어느 쪽으로 향할지 지켜볼 일이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