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나들이로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은 김환경(가명)씨. 공원 안내소에서 동물원 입구까지 1㎞ 남짓한 도로를 ‘코끼리 열차’를 타고 가며 왠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소 거무튀튀한 매연과 역한 냄새를 내뿜던 열차인데 이날따라 매연과 악취를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릉~’하는 엔진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아 조용했다. 내리면서 차량을 살펴보니 ‘온라인 전기자동차’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전기차를 타보니 ‘좋긴 좋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올 12월에 달라질 서울대공원의 가상 풍경이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가 기술 개발 중인 온라인 전기차(OLEV·On-Line Electric Vehicle)가 연말께 서울대공원의 코끼리 열차로 일반인에게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기름을 태우는 엔진 대신 전기 모터를 쓰는 전기차는 매연·소음·악취가 없어 친환경적이다. 또 기름값보다 전기값이 싼 만큼 경제적이다. 그러나 아직 개발 초기 단계여서 실험실이 아닌 실제 도로에서 얼마나 성능을 발휘할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서울시와 KAIST는 일단 서울대공원에 시범 도입한 뒤 성과가 좋으면 일반 시내버스에 순차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서남표 KAIST 총장은 11일 서울시청에서 이런 내용의 ‘친환경 온라인 전기차 시험 및 시범도입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이날 협약식에는 1970년대 ‘포니 신화’의 주역인 이충구(64) 전 현대자동차 사장도 참석했다. 서 총장이 온라인 전기차의 사업화를 위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인물이다. 그는 6월 초부터 KAIST가 설립한 벤처기업인 ㈜온라인전기자동차의 사장을 맡고 있다.
13일 ‘온라인 전기차 시연회’가 열린 대전 KAIST 문지캠퍼스에서 이 사장을 만났다. 이 사장은 “환경 문제를 고려할 때 자동차의 미래는 전기차라고 확신한다”며 “전기차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일반 전기차는 선진국이 다 하고 있지만 우리가 개발하려는 것은 기술 수준이 한 단계 높은 온라인 전기차”라며 “위험 부담도 있으나 성공하면 국내와 해외에 무궁무진한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장에선 KAIST가 개발한 전기버스가 국내외 취재진에게 공개됐다. 일반 버스의 차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엔진이 아닌 전기 모터를 달고, 바닥 쪽에 전기를 공급받는 장치를 설치했다. 취재진과 대학 관계자 30여 명을 태운 버스는 본관 앞을 출발한 뒤 부속동 건물을 돌아 다시 본관 앞까지 1㎞가량을 달렸다. 시속 5~6㎞로 천천히 달린 것을 제외하면 승차감은 일반 버스와 별 차이가 없었다. 물론 엔진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배기 가스도 전혀 없었다. 기술적으로 시속 100㎞ 이상도 가능하지만 시범 운행을 위한 구간이 짧아 일부러 속도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주최 측의 설명이다.
배터리 한계 넘어 주행 성능 향상
전기차 기술의 핵심은 차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전기를 어디서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이다. 현재 미국·일본 등에서 개발 중인 전기차에는 연료 탱크 대신 무거운 고용량 배터리가 들어간다. 배터리는 가정용 전기 플러그를 연결해 충전한다. 충전 방식만 보면 노트북·무선전화기 같은 휴대용 가전제품이나 전기차나 별 차이가 없다.
전기차의 주행 능력은 배터리의 성능이 좌우한다.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전기차인 미쓰비시 자동차의 ‘아이미브(i-MiEV)’는 완전 충전된 상태에서 최대 160㎞를 달린다고 한다. 배터리에 남은 전기가 없는 상태에서 완전 충전을 하려면 가정용 전원으로 8시간이 걸린다. 반면 일반 자동차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데 5분 정도면 충분하고, 연료 탱크를 가득 채우면 500㎞ 이상 달릴 수 있다. 따라서 전기차는 친환경적이란 장점에도 불구하고 주행거리와 충전시간에선 일반 차에 비해 크게 불리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반 가전제품처럼 전기 플러그를 계속 꽂아 쓰면 된다. 전차나 전철이 운행 노선을 따라 복잡한 전력 공급 설비를 설치한 이유다. 그러나 일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 사용하기는 어려운 방식이다.
KAIST의 온라인 전기차는 전력선이 연결된 전차와, 일반 도로를 자유롭게 달리는 자동차의 장점을 결합했다. 도로 밑바닥에서 차량에 직접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우선 아스팔트 밑에 고압 전력선을 깐다. 도로의 표면은 일반 도로와 똑같다. 그러나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에 의한 고주파 자기장이 생겨 도로 위로 올라온다. 이것을 차량 바닥 쪽에 설치된 집전판의 코일이 흡수해 다시 전기로 바꿔주는 원리다. 배터리는 용량이 작고 가벼운 예비용만 있으면 된다. 전력선이 없는 구간을 달릴 때는 예비용 배터리에서 전기를 모터에 공급한다.
KAIST는 기술 개발은 대학 내의 ‘온라인 전기차 사업단’, 사업화는 이충구 사장의 회사로 나눠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사업단장으로 연구 개발을 총괄하는 조동호(전기전자공학) 교수는 “도로 위를 흐르는 것은 전기가 아니고 자기장이기 때문에 누전이나 감전의 염려가 없고, 비가 오거나 도로가 물에 잠겨도 안전하다”며 “온라인 전기차가 지날 때만 자기장이 만들어지고, 일반 차량이나 사람에 대해선 자기장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온라인 전기차 기술을 실용화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도로면과 차량 바닥이 어느 정도 떨어져도 전력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하고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조 교수는 “도로면과 차량 바닥의 간격이 17㎝일 때 최대 72%의 전력 효율을 달성했다”며 “이는 교통안전 관련 규정을 준수하면서도 사업성이 충분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 사장은 “연구자가 아닌 사업자의 눈으로 보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면서도 “시범 운행을 하면서 충분히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KAIST는 현재 서울시를 비롯해 대전시·제주도와 업무협약을 맺었다. 서울시는 10억원을 들여 서울대공원 진입로 2.2㎞에 온라인 전기공급 시설을 깔고, 전기차 1대를 제작·운행할 계획이다. 대전은 대덕 연구단지, 제주는 일부 관광단지에 온라인 전기차 시범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 사장은 “향후 버스전용차선을 새로 깔거나 신도시 건설을 할 때 도로 공사 단계에서 같이 들어가면 훨씬 효율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비용은 30조, 경제효과는 400조”
이 사장은 “이번 프로젝트는 자동차 인생 40년을 건 마지막 도전”이라며 “내가 갖고 있는 기술·경험·지혜를 모두 쏟아붓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기존에 나온 전기차는 배터리의 한계가 뚜렷하다”며 “온라인 전기차가 성공하면 한국이 자동차의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공대에서 자동차공학을 전공한 이 사장이 학군장교(ROTC)로 군복무를 마치고 현대차에 첫발을 디딘 것은 69년이었다. 첫 3년을 울산 공장에서 현장 경험을 쌓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어느 날 상사의 호출을 받아 본사 사무실이 있던 세운상가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숙원 사업이던 ‘국산 고유 모델’ 개발에 참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이탈 디자인’이란 설계회사에 파견됐다. 차량 설계의 기본 개념조차 없던 상태에서 어깨 너머로 자동차 도면 그리는 법을 배웠다. 당시 1년6개월 동안 자취생활을 하면서 돈이 떨어져도 보내달라는 말을 못할 정도로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76년 최초의 국산 모델 ‘포니’를 탄생시킨 이후 포니2·스텔라·엑센트·아반떼·쏘나타 등 36종의 차량을 개발하거나 기획했다. 91년에는 순수 국산 기술로 제작한 엔진 1호인 ‘알파엔진’도 성공시켰다.
온라인 전기차는 서남표 총장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교육과학기술부의 국책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 올해 정부 예산에서 250억원을 지원받았으며, 내년에는 1000억원의 지원을 요청한 상태다. 이명박 대통령도 올 2월 KAIST를 방문해 전기차 시연회에 참여하는 관심을 보였다.
이 사장은 “3월 말 서 총장의 제안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다”며 “결국 남은 인생을 여기에 바치는 것이 사회적 의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포니도 성공시켰는데 지금은 여건이 훨씬 좋다”며 “인생은 어차피 난관의 연속이고, 지금까지 그런 난관을 극복하는 재미로 살아왔다”고 덧붙였다.
외국 언론의 관심도 높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13일자에서 온라인 전기차를 소개하며 “한국은 남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는 단계로 나가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프랑스의 AFP통신도 서남표 총장 인터뷰를 통해 “한국이 공상과학 소설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기대에 못지않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게 나온다. 도로에 충전 시설을 깔기 위해선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고, 직접 전기 플러그를 꽂는 방식에 비해 에너지 전달 효율이 떨어진다는 지적 등이다. 미국·일본 등이 온라인 전기차 개발에 소극적인 이유다.
이에 대해 KAIST는 “도로의 약 30%를 온라인 전기차가 달리게 하려면 (충전 시설 공사 및 차량 개발 등) 약 30조원이 들지만 원유수입 절감 등 기대 효과는 향후 30년간 약 400조원 가까이 된다”며 “충분히 경제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사장도 “한국은 경쟁국에 비해 전기차 개발이 늦었기 때문에 기존 형태로 가서는 승산이 높지 않다”며 “다른 나라가 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전기차를 개발해야 경쟁자를 압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출처 : 중앙SUNDAY(대전/주정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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